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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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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 테러와 정치 위기 (1976년 8월~1978년 10월 9일) === 이 국면에는 대규모 무차별 테러와 고위 정치인 납치가 이어졌다. 일상적인 소규모 공격이 이미 치안기관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대형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의 대응 능력에 대한 불신은 개별 장관이나 경찰 지휘부를 넘어 의회정치 전체로 향했다. 다만 의회와 행정이 완전히 기능을 멈춘 것은 아니며, 예산 협상과 입법이 반복적으로 지연되고 정치적 합의의 비용이 높아진 상태에 가까웠다. '''1976년 8월 14일 [[오보레 중앙역 폭발]]'''은 검은 10년의 단일 사건 중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낳았다. 토요일 오전, 여름 휴가철로 혼잡하던 대합실에서 폭발이 발생해 63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했다. 승객뿐 아니라 역무원과 주변 상업시설 종사자도 피해를 입었다. 대규모 사상자가 한꺼번에 발생하면서 지역의 구급·의료 체계가 압박을 받았고, 유족과 부상자의 신원 확인도 장기화되었다. 사건 직후 극좌 조직의 범행을 주장하는 성명이 유포되었으나, 성명 작성자와 실행자가 동일하다는 근거는 확보되지 않았다. 수사 초기에는 성명의 내용과 기존의 좌파 인물 자료를 중심으로 용의자를 좁혔고, 다른 방향의 제보와 물증은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 이후 [[질서회복단]] 관련자들의 책임이 재판에서 인정되었지만, 사건 당시의 수사 왜곡에 누가 어느 범위까지 관여했는지는 별개의 쟁점으로 남았다. 질서회복단의 목적은 불특정 시민의 희생을 통해 공포를 확산하고, 좌파에 대한 보복과 권위주의적 통치를 요구하는 여론을 키우는 것이었다. 이른바 '''긴장 조성 전략'''으로 설명되는 이 노선은 국가기관의 일부 인물에게 기대를 걸 수 있었지만, 기대와 실제 지휘·지원 관계는 구분된다. 군용 규격 물자의 존재나 수사 실패만으로 정부 전체가 공격을 지시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같은 해 11월 콜마르 은신처 급습으로 [[PAU|프롤레타리아 행동대]]는 지도부를 상실했다. 이미 [[도네 납치 사건|도네 석방]] 문제와 자금 배분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고, 일부 하부 조직은 중앙의 지시와 관계없이 강도와 공갈을 벌이고 있었다. 지도부 검거가 이러한 분열과 겹치면서 1977년에는 하나의 조직으로서 활동을 지속하지 못했다. 잔존 인원 전부가 동시에 체포되거나 사망한 것은 아니었다. '''1977년 2월 19일 [[베르통 정밀공업 폭파]]'''는 [[10월 전선]]의 예고 원칙이 현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콜마르 공장의 신관 조립동이 파괴되면서 잔업 중이던 노동자 4명이 사망했다. 조직은 약 40분 전에 경고 전화를 시도했으나 야간 경비실에 전달되지 않았고, 실제 대피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이 이루어졌다. 조직은 사흘 뒤 책임을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경고 시도와 사후 인정이 노동자 사망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았다. 공격 대상의 생산을 중단시킨다는 조직의 목표와 현장 노동자의 생명·고용을 지킨다는 반전 운동의 주장은 충돌했다. 이후 19명의 강경파가 [[직접행동대]]라는 이름으로 이탈했고, 잔류 지도부도 폭파 노선을 계속할 것인지 논쟁했다. 이 사건은 10월 전선의 활동 범위를 좁히고 지지층을 이탈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77년 4월 5일 [[뒤발 납치 사건|뒤발 납치]]'''는 위기를 정치적 타협의 가능성 자체로 확장했다. [[혁명적 노동자동맹]]은 벨포르 자택 인근에서 전 하원의장 앙리 뒤발을 납치했으며, 경호원 4명을 살해했다. 뒤발은 중도 진영과 합법 좌파의 협력을 통해 정부의 의회 기반을 넓히고, 반폭력 노선과 제도 개혁을 교환하는 구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반드시 즉각적인 연립내각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예산·입법 협력과 단계적인 국정 참여도 논의 대상이었다. 도르망 지도부는 이 구상을 기존 질서의 강화로 받아들였다. 좌파 정당이 정부 운영에 참여하고 노동자의 요구를 제도적으로 일부 해결한다면, 자신들이 주장하는 무장투쟁의 불가피성이 약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뒤발은 수감자 문제를 둘러싸고 정부와 대결할 상징적인 인질인 동시에, 온건 좌파와 중도 진영의 협력을 차단할 정치적 표적이었다. 정부는 조직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하는 공식 교섭을 거부했지만, 인질의 생존 확인과 석방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중재 시도까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가족과 종교계·정치권 일부는 비공식 접촉을 주장했고, 강경 대응론자들은 양보가 다음 납치를 부를 것이라고 반박했다. 감금 중 작성된 뒤발의 서한은 이러한 논쟁을 심화했다. 서한이 실제로 그가 쓴 것인지와 자유로운 판단을 표현한 것인지는 서로 다른 문제였다. 납치 51일 뒤인 '''5월 26일''', 조직은 뒤발을 살해하고 벨포르 시내에 시신을 유기했다. 이 사건으로 그가 중개하던 국정 협력 구상은 좌절되었다. 이는 조직이 원했던 단기적 결과의 하나였으므로, 사건의 모든 결과가 의도와 반대였다고 서술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조직이 기대한 대중적 급진화는 뒤따르지 않았다. 좌파 정당과 노조는 무장조직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테러 반대를 분명히 했으며, 조직에 남아 있던 소극적 묵인도 줄었다. 정치적 타협을 파괴하는 데 성공한 행위가 장기적으로는 조직의 고립을 심화한 셈이다. 뒤발 사건 이후 제정된 [[반테러 임시조치법(루이나)|반테러 임시조치법]]은 무장조직의 조직·가입·구체적 지원 행위를 처벌하고, 구금과 감청의 요건을 확대하며, 관련 사건을 집중 심리하는 특별재판부를 설치했다. 법관과 검사의 신변 보호가 강화되었고, 일부 재판은 보안이 확보된 교정시설 부속 법정에서 열렸다. 다만 법관의 거주지와 경호 정보를 보호하는 조치와 피고인이 재판부 구성 및 기피 사유를 확인할 권리를 제한하는 조치는 구별되어야 했다. 입법은 수사의 실무적 수단을 늘렸지만, 조직에 대한 정치적 공감과 실제 범죄 지원을 구별하지 않는 운용도 낳았다. 여러 사건이 함께 수사되면서 미결 구금이 장기화되었고, 혐의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은 피의자까지 수년간 재판을 기다리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부작용은 테러 반대에 동의하는 법조계와 노동계 내부에서도 비판받았다. 1977년 7월 [[청북전쟁]]이 정전으로 끝나면서 파병 중단을 요구하던 운동은 전쟁 책임, 귀환자의 처우, 징병 제도 개혁으로 의제를 옮겼다. 전쟁이 끝났다고 모든 반전 계열 조직이 즉시 해산한 것은 아니지만, 전쟁 수행을 물리적으로 방해한다는 명분은 약해졌다. 대부분의 귀환자는 직장과 가족생활로 복귀했으며, 소수의 무장조직 참여를 참전자 전체의 성향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특무처]]는 1977년 형식상 폐지되었다. 그러나 일부 인력과 기능, 기록은 후신 조직으로 옮겨갔고, 공개적인 조직 폐지가 과거 공작의 공개나 책임자 처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경찰의 대테러 수사는 확대되는 반면 비밀 공작의 기록은 별도로 관리되어, 기관 간 정보 격차가 해소되지 않았다. 의회에서는 여당 내부의 분열과 경제정책·치안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누적되었다. 1975~1978년에 내각이 네 차례 교체되면서 장관과 지휘부가 바뀔 때마다 협조 체계가 흔들렸다. 1974년과 1978년 총선에서 좌파 정당의 득표율은 각각 24.3%, 26.1%였으나 의석 점유율은 17.8%, 19.4%에 머물렀다. 이 격차에는 선거제도와 지지층의 지역적 분포가 영향을 주었으며, 이를 곧바로 부정선거의 증거로 해석할 수는 없다. 1977년 조사에서는 의회의 해결 능력을 신뢰한다는 응답이 19%, 군 개입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34%였다. 군 개입론이 의미 있는 규모로 존재했음을 보여주지만, 국민 다수가 군사반란을 지지했다는 뜻은 아니다. 재계와 보수 언론, 군부 내 일부 세력은 이 불안을 질서 회복 요구로 조직했고, 합법적 비상조치와 헌정 중단의 경계를 흐렸다. 공격 건수는 1977년 741건으로 최고치였으며, 사망자는 121명이었다.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해는 오보레 사건이 포함된 1976년의 147명이었다. 1978년의 연간 공격은 583건, 사망자는 109명이지만, 이 수치는 10월 이후 군정기까지 포함하므로 반란 직전의 상황만을 나타내는 지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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